디지털은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디지털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는 매일 디지털 공간에 수많은 기록을 남기며 살고 있다. 공공기관의 공문서, 기업의 업무 기록, 학교의 학생 포트폴리오, 심지어 SNS 게시물까지 모든 정보가 ‘기록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디지털 기록물은, 물리적 종이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쉽게 훼손되고, 손실되며,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조직에서 생산되는 전자기록물은 단순한 백업 파일이 아니다. 그것은 법적, 행정적, 사회적 책임을 담은 ‘증거’이며, 관리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정보 자산이다. 이 때문에 전자기록물 보존은 단순한 IT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관리 전략이자 기록의 생애주기(Lifecycle)를 설계하는 전문적 업무가 되었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나는, 졸업 후 전자기록물 관리 실습에 참여하면서 이 세계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도서관과는 다른 리듬, 다른 책임, 다른 언어를 가진 이 업무는 정보를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구조화하는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전자기록물 관리 실무자의 하루를 따라가며, 문헌정보학 전공자의 시선으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오전 9시, 기록을 ‘기록’하기 시작하는 순간
오전 9시, 하루의 시작은 기록물 수집 요청 확인으로 시작된다. 부서별로 전날 작성된 문서 중, 기록물로 분류되어야 할 자료를 시스템에 이관하거나, 보존 연한이 도래한 전자기록물에 대해 관리 조치 요청이 들어온다. 내가 맡은 업무는 이 요청을 검토하고, 기록의 메타데이터가 제대로 기재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문헌정보학에서 배운 메타데이터 구성 방식과 분류 체계가 이 순간에 빛을 발한다. 제목, 작성자, 작성일, 키워드, 보존기간, 문서등급 등은 단순한 필드가 아니라, 기록물의 법적 정당성과 향후 검색 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특히 ‘표준화된 분류어를 사용하는가?’, ‘내용 요약이 너무 모호하지 않은가?’, ‘보존기간은 규정과 일치하는가?’를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
이 작업은 단순한 점검이 아니다. 조금의 실수로, 5년 뒤 필요한 문서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관리에서 정보는 ‘나중에’ 반드시 쓰이게 될 ‘증거’이기에, 지금의 분류와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 문헌정보학 전공자로서 나는 이 메타데이터 하나하나가 검색성과 보존성을 동시에 결정하는 정보 설계의 축임을 알고 있기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었다.
오후 1시, 디지털 보존은 기술이 아니라 설계다
점심 이후에는 전자기록물 장기 보존 포맷 변환 작업이 이어진다. 단기 보존이 아닌, 10년 이상 보존이 필요한 기록물은 일반 문서 파일이 아닌 보존용 포맷(PDF/A, XML, TIFF 등)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깨지는 폰트, 누락된 도표, 원본 이미지 손상 문제 등 기술적 오류를 사전에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단순한 포맷 변환을 넘는다. 왜냐하면 디지털 기록물은 그 형식과 구조가 함께 보존되어야 ‘원본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서 안에 삽입된 이미지가 삭제되거나, 문서의 작성자가 누락되면 그 정보는 이미 ‘훼손된 기록’이 된다.
문헌정보학에서 배운 ‘정보 구조’ 개념은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단지 내용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맥락을 함께 보존할 수 있도록 메타 정보까지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이때 메타데이터 스키마(XML 기반), 기록물 인코딩 방식, 파일 저장 정책 등이 고려 대상이 된다. 실무자는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설계자여야 한다.
이처럼 전자기록물 보존은 기술적 지식과 정보 구조 설계 능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문헌정보학 전공자가 정보 탐색과 구조화에 강점을 가진 만큼, 이 영역에서 정보 설계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오후 3시, 책임이 따르는 정보 기록의 무게
오후에는 기록물 평가 회의에 참여한다. 보존 기간이 만료된 기록물을 폐기할지, 연장할지, 영구 보존 대상인지 결정하는 중요한 절차다. 이 회의에서는 단순히 ‘기한이 지났으니 버린다’는 판단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록의 맥락, 발생 시점의 사회적 가치, 기관의 정책 방향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헌정보학 전공자로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기록물이 어떤 정보 흐름에서 생산되었고, 어떤 다른 기록물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맥락적 분석이다. 예를 들어, 정책 초안과 최종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메모들이 모두 폐기될 경우, 그 정책이 왜 그렇게 결정되었는지를 후대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기록물은 개별 문서가 아니라, 정보 연결망의 일부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실감한 것은, 기록관리란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정보의 생명주기를 책임지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문헌정보학은 ‘정보를 어떻게 잘 찾게 할까’를 고민하는 학문이지만, 기록관리 실무에서는 ‘이 정보가 훗날 어떤 의미를 가질까’를 상상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이 두 시선이 만날 때, 전자기록물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사회의 기억으로 남는다.
정보의 윤리성과 보존의 책임, 문헌정보학의 눈으로 본 기록의 가치
전자기록물 보존 업무를 하면서 내가 특히 고민하게 된 것은 정보를 다루는 윤리적 책임이었다. 단지 데이터로서 문서를 다룬다면, 빠르게 분류하고 보관하고 폐기하면 된다. 그러나 문헌정보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정보 하나하나가 맥락과 목적,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실제로 한 번은 외부 감사 자료로 제출된 전자기록물이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기관 내부에서 큰 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 발견된 건, 누락된 정보 자체보다 기록물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한 ‘관리의 흔적’이었다. 즉, 기록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신뢰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보존되었느냐였다.
문헌정보학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보를 왜, 어떻게, 누구를 위해 다룰 것인가에 대한 철학을 포함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 철학은 실무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기록관리 실무자에게 필요한 건 기술적 숙련뿐 아니라, 정보를 존중하는 태도와, 기록이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인식이다. 문헌정보학 전공자라면, 이 점에서 누구보다 깊이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
문헌정보학 전공자, 기록의 설계자가 되다
전자기록물 보존 실무를 경험하면서, 나는 문헌정보학이 단지 도서관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정보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설계하고 전달하고 보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근본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우리가 배운 분류, 색인, 메타데이터 설계, 정보 구조화는 모두 기록관리의 실무와 맞닿아 있었다.
더불어 문헌정보학 전공자는 기록관리 현장에서 ‘정보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다. 단지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가 훗날에도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기록물 보존은 조용하고, 반복적인 일이지만, 그 기록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권리이고, 한 사회의 기억이고, 미래의 지식 자산이다. 그것을 지키고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문헌정보학 전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는, 기록이 단순한 파일이 아니라 역사가 되는 순간들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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